새 술은 새 부대에


<아무도 새로운 천조각을 낡은 옷에 덧붙이지 않나니..>

새롭고 신선하고 젊은 종교는 전통에 어울릴 수가 없다.

언젠가 그 신선함이 사라지면 그 때는 잘 어울릴 것이고

그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전통이, 죽은 과거가 될 것이다.

살아 있는 종교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그러나 전통은 단지 하나의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

그 차이를 느껴본 적이 있는가?

이 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대가 한 여성을 사랑한다고 하자. 그 여성도 여기에 존재하고 있고

그대 또한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대들 두 사람 사이로

사랑이 흐른다. 그것은 하나의 현존이다. 규정지을 수 없는 무엇인가가,

쉽게 파악할 수 없고 비물질적이고 영적인 무엇인가가

그대 두 사람을 감싸고 있다.

여태까지 다른 세계에 존재하던 무엇인가가

그대들 두 사람 주위로 내려온다.

그대들은 완전히 다른 세계 속에서 살게 된다.

아주 새로운 어떤 미지의 차원으로 옮겨간다.

 

그러다가 여자가 가버렸다고 하자. 그때 사랑도 끝이 나고

여러 해가 흘렀다. 이제 그것은 단지 하나의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

이따금 그대는 회상에 잠길 수도 있다. 눈을 감고 그 축복의 순간들을

다시금 응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흐릿한 기억에 지나지 않으며

생생한 현실이 아니다.

아직 느낌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순간순간의 체험을 통한 느낌이 아니라

기억을 통한 느낌일 따름이다.

사랑이 진행되고 있을 때는 그 느낌은 즉각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언제라도 만질 수 있는, 그대 주위를 감싸고 있는

생생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은 하나의 기억이 되어 버렸다.

 

한 송이 꽃으로 예를 들자면 아침에는 싱싱해서 햇빛을 빨아들이고

산들바람 속에 춤을 추었었다. 그런데 저녁이 되어 꽃잎은 시들고

향기는 날아가 버렸다. 기억 속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그대는 그것을 생각할 수는 있지만 되살릴 수는 없다.

그것에 대한 생각은 과거에 집착하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전통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이다.

붓다는 2500년 전에 살았었고 예수는 2000년 전에, 그리고 크리슈나는

거의 5000년 전 사람이다.

예수가 이땅에 살았을 때 뭔가 중요한 일들이 일어났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

꽃은 시들었고 향기도 날아가 버렸다.

오직 허공만이 남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허공을 숭배하고 있다.

그들은 그 주위에 교회를 세우고 성전을 건립했다.

텅 빈 허공을 숭배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

 

도대체 어째서 이런 어리석음이 인간의 생각 속에 자리잡게 된 것일까?

꽃이 여기에 있을 때는 그대는 그 꽃을 피한다.

그러다 꽃이 사라지고 허공만이 남았을 때 그대는 사라지고 없는 그 꽃을

숭배하고 찬양한다. 그대는 살아 있는 진짜 종교를 겁낸다.

그 결과 그대는 기독교인이 되고 불교인이 되고 회교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간교한 속임수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종교를 회피하기 위한 대리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종교는 그대를 탈바꿈시키기 때문이다.

참 종교는 현재의 그대를 파괴하여 새로 거듭나게 한다.

뭔가 미지의 새로운 것이 종교를 통해 그대에게로 흘러들어온다.

그대는 바로 그것을 겁내는 것이다.

죽어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

-그대는 그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대는 더욱더 전통에 달라붙는 것이다.

 

    -오쇼 라즈니쉬

by 청아 | 2009/06/17 17:34 | 율왈(聿曰=書)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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